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사례 (문단 편집) ==== [[헝가리 왕국]]★◆ ==== ||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516-1526).svg.png|width=400]] || || 헝가리 왕국의 국기(1516-1526) || ||<-2> '''원인''' || || 전쟁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br]'''__[[몽골 제국|외세가]] [[오스만 제국|무력으로 제압]]__'''[br]'''[[오스만 헝가리|패전해 정복을 겪음]]'''|| || 내부 혼란 ||봉기|| || 부패와 양극화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귀족들의 국정 병탄과 땅에 떨어진 국왕의 권위]|| || 지도층 불안정 ||'''[[울라슬로 2세|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br]'''[[러요시 2세|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국론의 관리 실패'''[* 중앙과 지방의 대립]|| || 군사력 불안정 ||'''__[[모히 전투|국방력]] [[모하치 전투|대붕괴]]__'''|| || 내정 문제 ||'''[[마차시 1세|개혁 실패]]'''[* 무리한 권력·재력 강화 시전]|| || 공황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국고 고갈|| || 자연재해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2> '''결과''' || || 멸망 ||소요(분리독립), 국치(유린, 합병) || 서기 1000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에 의해 [[헝가리 대공국]]이 [[헝가리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헝가리 왕국이 새로이 건국되었다. 신생국 헝가리는 1102년에 [[칼만]] 국왕이 [[크로아트 왕국|중세 크로아티아 왕국]]과 동군연합을 맺고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에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고 서유럽의 제후국들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하여 십자군 원정을 벌이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함께 유럽의 [[강대국]]들 중 하나로 군림했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의 [[마누일 대제]] 치세의 [[동로마 제국]]과 [[호엔슈타우펜 왕조]] 치세의 [[신성 로마 제국]]에 밀려 그렇게 영향력을 끼치진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헝가리 왕국은 당시 남동유럽, 지중해 일대의 패권국 [[동로마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세르비아인들과 연대하여 동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가 [[하람 전투]]와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왕국은 여전히 강력했고,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패전한 [[동로마 제국]]이 [[십자군]]에 의하여 [[라틴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으로 분할되며 몰락하자 [[동로마 제국]]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봉신서약을 깨고, 세력권을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자기 동방에서 쳐들어온 침략자이자 [[몽골 제국]]의 명장인 [[수부타이]]와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이 침략하자 벨러 4세는 8만의 군사를 징병하여 사요 강에서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에 응전하나 징집한 8만 군사 대부분이 죽는 참패를 당했다.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 왕국]]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돌아갔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국 내에서 전염병까지 창궐하게 되며 헝가리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고, 이 인구를 회복하는데 약 300년의 기간이 걸릴 정도였으며 이는 왕국의 발전에 크나큰 족쇄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4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8세가 악수를 두며 자멸하자 동로마 제국 일대를 차지하고 남방의 발칸 반도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과 소모전을 벌이면서 조금씩 국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에게 연패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미하일 8세]]의 트롤짓(...)으로 인하여 약소국으로 굴러떨어진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헝가리 왕국은 마치시 1세의 치세에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차시 1세]]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군주가 되었으며, 상비 용병대인 검은 군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보강하는 등,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는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마침내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그리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더니 전제군주가 되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귀족들은 당연히 국왕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시 1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마차시 1세의 유언장은 상큼하게 씹어버리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것 같은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프를 [[울라슬로 2세]][* 단순히 예스맨이어서 뽑은 것은 아니고 울라슬로 2세는 전전 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라슬로 5세]]의 외조카이자 전전전 왕 [[브와디스와프 3세|울라슬로 1세]]의 조카였다.]로 옹립했다. 거기에다 오스만 제국은 나날이 강성해져 갔고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가 즉위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수아 1세]]를 당장 석방하고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가겠노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고 이를 구실로 쉴레이만 대제는 군사를 일으켜 [[메흐메트 2세]]의 한이었던 헝가리 왕국을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헝가리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토모리 팔이라는 인물에게 헝가리 남부의 방어를 명령한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지만, 그마저도 '일단 파견해놓고 보자' 라는 식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대주교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방어 전체를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1526년 4월에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가 친히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헝가리의 귀족들은 7월 2일까지 군사를 이끌고 집결지로 모이라는 왕명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국왕 [[러요시 2세]] 자신도 출전 채비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집결지에 모인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러요시 2세는 부랴부랴 국왕이 친히 모범을 보인다며 먼저 집결지로 향했고, 그제서야 헝가리 귀족들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어렵사리 헝가리군을 긁어모은 21세의 러요시 2세는, 경험이 적은 자신을 대신하여 사실상 군대를 지휘하게 된 토모리 팔과 서포여이 죄르지, 서포여이 야노시 형제 등 지휘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귀족인 서포여이 야노시가 이끄는 8,000명에서 13,000명 가량의 군사는 트란실바니아를 지키고,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정확히는 동군연합) 크로아티아를 수비하기 위해 다시 5,000명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러요시 2세 자신은 토모리 팔과 서포여이 죄르지를 부관으로 삼고, 25,000명에서 3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군사를 나눈 것이기는 했지만, 오스만군이 [[발칸]]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도 [[크로아티아 왕국]]도 아닌 부다로 바로 쳐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스만군의 위치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는 이미 에르데이나 크로아티아로 파견한 군사를 불러들이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그 때문에 러요시 2세는 결국 [[황산벌 전투]]의 [[계백]]마냥 2만 5천에서 3만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최소 2배에 달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싸우게 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헝가리 왕국군은 '''당연히 참패했고''', 왕국은 3개로 분할되어 각각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 합병되고 나머지는 서포여이 야노시의 [[동헝가리 왕국]][* 1570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성 이슈트반 왕관]]을 [[막시밀리안 2세]]에게 넘겨주면서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이 된다.]으로 분할되는 것으로 헝가리 왕국은 멸망하고 만다. 전체적으로 보면 [[백제]]와 멸망 과정이 비슷한데, 국가 원수가 무리하게 중앙 집권 정책을 시행하다 실패하여 이것이 멸망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과,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의 말을 전혀 따르지 않고 군사를 보내지 않은 점, [[황산벌 전투|적은 병력만으로 아군의 3배 이상의 병력을 가진 적군과 맞서 싸워야만 했던 점]], 당시 [[오스만 제국]]의 물량은 헝가리 왕국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어찌보면 동유럽의 [[백제]]라고도 부를수 있는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